본문 바로가기

여행이야기/[연재] 길에서만난사람

<26>멕시코 바야돌리드 - 느린 삶을 사는 마리부부

◇ 세노테 사무라(Cenote Samula)의 신비로운 풍경. 천장의 구멍에서 내려온 나무뿌리가 바닥의 호수까지 닿아 있다.


멕시코 여행을 시작한 지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몸과 마음이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의사소통도 힘들었지만 불안한 치안 때문에 항상 긴장했던 탓이다.
그러던 중에 도착한 바야돌리드는 지친 내게 꿀물 같은 휴식을 선사해 준 곳이다.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니 익숙한 국제 유스호스텔 마크가 나타났다.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도미토리로 운영되던 방은 평범했지만 창 너머 보이는 정원은 특별했다.
정글처럼 울창한 숲(?)을 지나 맑게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정원을 걸었다. 기분이 좋아진다.
저편에 부드러운 파스텔톤의 테이블과 의자가 보였다.

‘뭐지?’ 싶어 조금 더 걸어가니 정원 한가운데 난데없이 주방이 나타났다.
세상에, 정원 한가운데 주방이라니!

오즈의 마법사에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날아갔던 집이 밀밭 한가운데 갑자기 뚝 떨어져 내린 것 같다.
게다가 정리 정돈은 어찌나 잘되어 있던지 후라이팬이며 컵이며 하나같이 너무 깨끗하다.

◇ 정글 속의 주방

이전 여행지였던 산크리스토발의 호스텔이 떠올랐다.
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청소하지 않은 것 같은 방에는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환기시키지 않은 것 같던 방안의 퀴퀴한 냄새는 또 어떻고!
주방의 개수대에는 ‘각자 사용한 접시를 씻으시오.’라고 써 있는데
그 문장이 민망해질 만큼 지저분한 접시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_-;

그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이다. 요리가 마구 하고 싶어졌다.
기분이 좋아져 저녁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오늘 저녁은 간만에 스테이크로 포식을 해야겠다~! :)’

지글지글 고기 굽는 냄새가 정원에 퍼져 나가고 콧노래를 절로 흥얼댄다.
그때 갑자기 정글 숲이 ‘바시락’하더니 동양인 커플이 등장했다.
‘세상에나! 이번엔 얼마 만에 보는 동양인이야. 이곳 정글 속 주방은 정말이지 마법의 공간이구나.’

말 한마디 없이 음식을 조용조용히 준비하는 모습을 보니 일본인이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 여행자라면 늘 하는 질문을 했다.

“여행한 지 얼마나 되셨어요?”
“1년쯤요.”

마리는 현재의 남편을 여행 중 태국 방콕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는 그저 친구 사이였는데, 서퍼였던 그녀가 남편이 살던 도시로 이사 오면서 다시 연락하게 되었단다.
그러다 사랑에 빠져 결혼해 신혼여행으로 오랜 여행을 떠났다. 벌써 1년 전에 말이다.

◇ 인신공양을 하던 동굴 속 연못, 세노테 사치.

“어머, 정말 낭만적이에요. 여행 중에 만나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으로 세계여행이라니! 
 그런데, 두 분이서 함께 세계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일본으로 돌아간 후가 걱정되지 않으세요? 
  다시 직업을 가져야 하고 아기도 가져야 하는데, 미래가 두렵지는 않은가요?”

“우리는 돈 버는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요. 
 차를 사고, 집을 사거나 하는 그런 삶 말이에요. 우리에게는 꿈이 있어요.”

“어떤 꿈인데요?”
“오키나와에 가서 사는 거예요.”
하필이면 왜 오키나와죠?”
“우리는 일본에서 가장 느린 삶을 살 수 있는 곳이 어딜까 고민해 보았어요.
 그곳이 바로 오키나와죠. 저는 서퍼 강사였고, 원래 어느 정도 영어를 했는데
 이번에 남미에서 8개월 동안 있으면서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오키나와에는 호텔이 많으니 그곳 리셉션 같은 곳에서 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남편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겠죠. 허드렛일도 상관없어요.”


오키나와에서 살고 싶어하는 이유가 ‘느린 삶’ 때문이라니, 정말 매력적인 부부다. :)

다음날 혼자서 바야돌리드 근처의 동굴을 구경하러 갔다.
미끄러운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가니 동굴 속 호수가 나타났다.
천장의 구멍에서 길게 내려온 뿌리가 호수의 바닥까지 닿아 있고,
그곳에서 내려온 빛은 동굴 속 호수를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게 한다.

혼자밖에 없다. 혼자만의 동굴 속 천연수영장!
준비해 온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서둘러 물 안으로 들어갔다.

차갑고 깨끗한 물이 온몸에 닿고,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찰랑찰랑’ 물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진다.
혼자서 수영하다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무서워져서 얼른 물에서 나왔다.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마리와 그의 남편이다.

“반가워요. 혼자 수영하고 있었는데 무서웠어요. ㅠㅠ”

부부는 익숙하게 한 사람은 물안경, 다른 한 사람은 스노클링 장비를 꺼내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 남편과 신혼여행 겸 세계여행을 하고 있던 마리.

“빛이 없는 곳은 완전히 깜깜해. 전혀 보이지 않아. 이거 무서운걸.”

날 배려해 마리의 남편이 영어로 말했다.
그는 잠시 수영을 하다 옷을 갈아입으러 뒤쪽으로 가고 마리만 남았다.
그때는 한참동안 결혼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중이라 마리에게 몇 가지를 물어봤다.

“1년 동안 함께 여행해 보니 어떠세요? 연애 때 느꼈던 사랑의 감정은 여전한가요? -.-”

마리는 남편이 들을까 속삭이듯 말했다.

“여전하긴요, 누군가와 24시간 동안 함께 지내 보세요. 어찌나 많이 싸웠는지….
 정말 지겹도록 싸웠어요. 아무리 사랑해도 좀 떨어져 있어야 해요.”


멕시코 바야돌리드
멕시코의 유카탄반도에 자리한 바야돌리드는 마야인들이 살던 곳으로, 16세기 스페인에 의해 바야돌리드라는 이름으로 건설된 도시다.
바야돌리드의 볼거리로는 세노테(Cenote·동굴)가 있는데, 모두 동굴 안에 호수가 있어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인신 공양의 풍습이 있던 고대 마야인들은 사람을 제물로 바친 후 그 시체를 이곳 동굴 앞 우물에 버리기도 했다. 세노테 사치(Cenote Zaci), 세노테 스케켄(Cenote X-keken),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세노테 사물라(Cenote Samula)가 있다. 입장료는 각각 30페소 정도 한다.

여행정보
바야돌리드까지 직항은 없고, 비행기가 닿는 칸쿤에서 버스를 4∼5시간 정도 타야 한다. 한국에서 칸쿤까지는 콘티넨털항공과 에어캐나다가 취항하는데, 모두 2회 경유하며 24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멕시코의 화폐는 페소(Peso)로, 1페소는 약 106원 정도. 바야돌리드의 유스호스텔인 알베르케 라 칸델라리아(Aberque la Candelaria)의 도미토리 가격은 100페소 정도이며, 아름다운 정원과 파스텔톤으로 채색된 깨끗한 주방을 가지고 있다.

<세계일보에 올려진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