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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연재] 순례자의 길

[순례자의 길11] 아홉째 날, 사람들의 십자가


이 글은 아홉째 날의 이야기지만 첫 번째 글은 까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이니
처음 읽으시는 분은 위에 글을 먼저 읽어주세요~ :)

 [위의 사진] 순례자와 소녀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깼다.
겨우 7명이 머물렀으므로 우리 숙소는 평온했다.

창 밖을 보니 순례자 모녀가 식수대에서
아무런 말없이 물을 받는 모습이 보인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순례자들이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는 걸 모를꺼야. 모두 자고 있을테니..."

할아버지가 차려주신 따뜻한 커피와 빵을 먹고
기부금함에 돈을 넣고, 눈가가 촉촉해진 할아버지와
양쪽 뺨을 대고 인사를 하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마을은 조용했다.

성당 앞 광장의 식수대의 쫄쫄쫄
물 흐르는 소리와 새 소리 뿐.

할아버지의 얼굴이 눈에 밟혔지만,
씩씩하게 걸어 마을을 떠났다.

[위의 사진]  할아버지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돌아봤다. 저 멀리 비아나가 보인다.

아홉째날, 벤토사(Ventosa) 25km (28~9km로 체감 추정. -_-;)
이틀째 평지가 계속되고 있다. (행복하다. ㅠ_ㅠ)
빨리 걷는 것에도 익숙해져 이제 달팽이들도 안밟도록 신경쓰면서 빨리 걸을 수 있게 됐다.

[위의 사진] 지역에 따라 다른 모양의 달팽이들. 왼쪽은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현재까지 순서대로~
가운데 달팽이 너무 징그러워. ㅠ_ㅠ


[오른쪽 사진] 도로를 끼고 갈 때 순례자의 길(붉은 부분)

대부분 순례자의 길은 시골길 같은 곳이 많은데
종종 [오른쪽 사진] 처럼 도로를 끼고가는 경우가 생긴다.

아주 드물게는 차도에서 걷게 되는 경우가 있지만
보통은 사진에서처럼 바로 옆에 길이 마련되어 있다.

이런 분리된 길의 장점은 '안전'이다.

이 때 저 편에 보이는 나무들이
도로와 순례자의 길을 시각적으로도 분리시켜
걷는데 되도록 집중하게 해준다.

바닥은 부드러운 흙길이 발에는 가장 편안하나
자갈길이나 돌길도 많고 아스팔트길도 꽤 된다.

신발은 정말 중요하다.

[위의 사진] 순례자가 그린 순례자들.
 
[위의 사진]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나바레떼(Navarrete)가 보인다.


언덕을 넘자 도시가 나타났다.

이때까지는 작은 마을이나 소도시였을 뿐인데...
걸은지 며칠이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도시를 보니 두려움이 앞선다.

길게 한 길로 뻗은 길에서는 표지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지만,
두 세 갈래 길이 나오면 허둥지둥 노란 화살표를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누군가가 내가 갈 길을 알려준다는 것은 얼마나 편한 일인가?) 그래, 어렵지 않다.
하지만, 복잡한 도시에 가면 화살표 찾기는 숨은 그림찾기가 되어 버린다.
혼란과 혼동 속에 화살표를 찾아내는 것, 이쩌면 이게 우리의 삶의 모습이다.


무엇보다 난 사람들이 만나기 싫었다.

[위의 사진] 가까이 갈 수록 도시는 점점 더 커 보이고 두려워진다.

 [위의 사진] 화살표는 구시가지를 관통한다. 성당 옆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물받는 곳이 있다.

 [위의 사진] 순례자들을 그린 그림도 있다. 귀엽다.
친구가 있었다면 분명 저 벽 옆에서 물마시는 적당한 포즈를 취해 사진을 찍었을텐데.


비아나에서 7시 반에 출발해 나바레떼에 1시 10분에 도착했다. 
21.5km, 총 5시간 40분 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머물 것이다.
생쟁에서 받은 31일 코스의 거리&고도가 표시된 종이에는 이곳이 오늘의 목적지니까.

아름다운 시골보다 쇼핑하고 구경할 꺼리가 많은 도시를 좋아하는 내가
순례자의 길을 걷는 동안엔 정말 이상해졌다.

도시에 있으면 마음이 불편했고 왠지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런 얘길 길에서 만났던 이탈리아 할아버지에게 했더니...

" 중세시대의 순례자는 은둔자였지.
  길도 지금의 길처럼 중심가를 지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빙~ 돌아갔었어.
  요즘은 관광산업으로 개발하려고 저러는 거란다. 그런데, 너야말로 정말 순례자 같구나. "


난 신자도 아니고 정말 순례를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난 순례와 관련된 사람들 빼곤 사람들을 피했고(왠지는 나도 모르겠다)
큰 도시에 도착하면 도망치듯 그 곳을 벗어났다.

" 어떡하지? " 일단 밥을 먹으며 생각하자.
나바레떼 알베르게 앞의 식당에서 주문을 했다. 

[위의 사진] 이날 먹었던 점심. 9유로+카페 1유로= 10유로


내가 좋아하는 후식, 플랑과 에스프레소를 먹으며
지도를 보니 3.5km 뒤에 벤토사(Ventosa)라는 곳이 있었다. 알베르게도 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곳에 머물지 않기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금방 후회했다. -_-
길에 순례자들도 없고... 비도 오고.... 나바레떼에 묵을 껄 그랬나...-_-;;

그 때... 이런 길이 나타났다.

[위의 사진] 저 철망엔 뭐지?

철망에 뭔가가 빼곡히 걸려있었다. 자세히 보니....

[위의 사진] 십.자.가.였다.

수천개는 되는 것 같았다. 100여미터나 이어진 철망을 따라 빼곡하게 꽂혀진 십자가들.

크고 작은, 나무와 꽃, 지푸라기로 만든 십자가들이 그곳에 매달려 있었다.

사람들의 소망과 기도, 의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벅찬 감동으로 내 심장에 다가왔다.

이 길엔 지금 나 혼자 걷고 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것.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었고 또, 걸을 거라는 것.

인간의 길은 외롭지만, 누구나 겪어야할 과정이라는 것.

눈물이 뭉클해
한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십자가 길은 한동안 그렇게 주욱 이어졌고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갔다.

벤토사는 어디에?

[위의 사진] 앞에 보이는 저 마을이 벤토사일까?

아니었다. -_-;

길은 나눠지고 있었다.

산티아고로 가는 중간중간 갈래 길이 생긴다.
양쪽 길 중 그 어느 곳을 선택해도 좋다. 그건 당신의 자유.

조금 돌아가며 아름다운 길을 볼 수도 있고,
조금 빨리가며 아스팔트 길을 걸을 수도 있다.

길에 세워진 지도를 보니 벤토사를 통해 나헤라(Najera)가는 길은 거리상으론 비슷비슷.
조금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벤토사라는 이름이 맘에 들었어!

[위의 사진] 사실 이 길은 좀 웃겼다. ㅋㅋ 위트있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

하지만, 벤토사는 도대체 언제 나와? ㅠ_ㅠ

분명히 3.5km 떨어진 곳이 아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종이에는 3.5km라고 되어 있지만
걷기 시작한지 한시간이 넘었으니... 절대절대 3.5km떨어진 곳이 아니다. -_-

[위의 사진] 마을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다! ㅠ_ㅠ


도대체 벤토사는 어디에 있는거야! ㅠ_ㅠ
 
그렇게 낙담하고 있을 때면.... 

[위의 사진] 이런 식으로 용기를 잊지 말라는 글이 바닥에 써 있었다. -_-;
뭔가 이상해. 아무래도 알베르게의 농간인 것 같아.

그렇게 1시간도 아니고, 2시간도 아니고
자그마치 2시간 40분이 걸려
4시 20분에 벤토사에 도착했다. -_-;

7시 30분 출발, 4시 20분에 도착.
9시간을 걸었다. --;;;

옷과 신발은 쫄딱 다 젖고...
발은 신발안에서, 양말안에서 불어 버렸다.

예상보다 더 걷는 바람에 기진맥진.

도착해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나처럼 3.5km로 알고 걸은 사람도 있다. -_-;
나바레떼에서 6~7키로는 떨어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마을에 하나 밖에 없는
정말 쬐끄만 구멍가게도 내가 갔을 땐
문을 닫고,
마을엔 식당도 없어
가방 안에 있던 크로와상과 요구르트,
복숭아를 먹고 7시 반부터 잤다.
(고생해서 맛난 밥 사먹으려고 했는데! ㅠ_ㅠ)


[오른쪽 위의 사진] 벤토사 알베르게(주방있음), 7유로
아침 +2.5유로
빵은 별로 맛이 없었지만, 식탁에 과일이 나왔다!! -.-
(빵+아침에 먹는 비스켓+2가지 잼+커피와 우류+체리,사과,오렌지)

이 숙소에서 얻은 기쁨이라면,
파울로 코엘료가 다녀간 곳이라는 점. 하하하!
실내에 알베르게 주인과 찍은 사진이 있다. :)  (별로 안찍고 싶어하는 표정이었음. ㅎㅎ)

벤토사는 순례자들이 많이 가는 곳은 아니지만
비오는 날 가서 그런지 몰라도 잠깐 결계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드는 마을이었다.


2007. 7. 23(2010.2.15 업데이트) pretty 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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