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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연재] 길에서만난사람

<3>페루 나스카 - 외계인의 후예 같았던 ‘무에타이 부부'

이 글은 세계일보에서 [박정은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란 꼭지로
2007.7.19~2009.3.19일간 연재했던 글입니다.
신문에 썼던 글이라 조금 딱딱한 부분은 조금 수정했습니다. :)


◇모라이(Moray·잉카인들이 고산지대에 계단식으로 만든 식물 시험 경작지)에서
대련 중인 ‘무에타이 부부’


에콰도르 수도 키토의 한 호텔. 한국 사람은커녕 동양 사람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그곳의 호텔에서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뭐야…꿈인가?’ 꿈이 아니었다. 정말 한국 사람이었다. 게다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씩이나.

그들은 남미를 여행 중인 부부였다. 그런데 일정을 줄여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부인이 심하게 아팠고, 여행 중 티격태격 싸우면서 서로 토라진 것이다.

“남미 여행 오기가 얼마나 힘든데, 이런 좋은 기회를.... 한국에 돌아가면 정말 후회할 거예요.” 나는 금방이라도 짐을 쌀 듯한 그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얼마 후 설득이 통했는지 이들은 예정대로 아르헨티나까지 일정을 무사히 마친 후 한국으로 돌아갔다. 페루에서는 나와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나는 이 부부를 ‘무에타이 부부’라고 불렀는데 그 사연은 이렇다.

치안이 불안한 남미에서는 종종 택시기사가 강도로 돌변한다. 그래서 혼자 여행할 경우 웬만해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한번은 이 부부와 함께 택시를 타게 됐다. 당연히 남미 택시의 악명에 대해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때 부인이 말했다.

“언니, 걱정하지 말아요. 택시기사가 강도로 돌변하면 일단 신랑이 택시기사의 목을 조르며 움직이지 못하게 할 거예요. 그러면 제가 로우킥을 날릴 테니 언니는 가만히 계세요. 안심해도 돼요.”

얼마나 든든하던지…. 무에타이는 태국 격투기 무술의 일종인데 흉흉한 세상에 호신술로 부인이 배우기 시작해 남편까지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무에타이를 부부가 함께 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들 부부의 캐릭터도 상당히 특이했다. 영화 ‘맨 인 블랙’의 등장인물처럼 인간을 가장한 외계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유쾌한 대화에 이들과 같이 다니는 건 항상 즐거웠다.

특히 페루 나스카에서 경비행기를 함께 탄 경험을 잊을 수 없다. 나스카 평원의 그림을 감상하려면 이 비행기를 타야 한다. 4인승 비행기였는데 앞좌석엔 조종사와 무에타이 남편이 앉고, 뒤에는 무에타이 부인과 내가 앉았다. 경비행기는 작은 바람에도 잘 흔들리는데, 나스카 라인을 보기 위해 급격하게 방향을 바꾸기 때문에 멀미가 무척 심했다.

처음 비행기에 올랐을 때는 ‘정말 외계인이 만든 것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어’라는 초등학생 때의 결심을 되새기며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이륙한 지 10분 만에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눈을 감아버렸다. 다시 5분 뒤에는 비닐봉지를 입에 대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만 했다.

◇ 하늘에서 본 나스카 라인 중 벌새 그림.


그러나 전혀 멀미를 하지 않았던 무에타이 남편은 고통스러워하는 내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모습을 사진기에 담으며 즐거워했다. 나는 경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바로 의자에 드러누워 버렸다. 이때도 역시 무에타이 남편은 드러누운 내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위의 사진은 신문에는 실리지 않은 사진, 왼쪽이 무에타이 남편>


한국에 돌아와 그때의 사진을 받았다. 사진을 볼 때마다 당시의 울렁거림이 되살아나고 멀미의 고통이 떠올랐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현장감 있는 사진을 찍어준 덕분에 여행의 추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어 고마웠다. 사진을 볼 때마다 자꾸 웃음이 난다.

<위의 사진은 신문에는 실리지 않은 사진, 멀미에 쓰러진 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비행기를 타고서도 멀쩡했던 그는 정말 외계인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그 어지러운 하늘에서 웃기까지 하다니! 아무래도 비행에 익숙해서(외계인이라) 그런 것은 아닐까? 

얼마 전 재미난 수집품으로 가득 찬 집에 초대받았을 때 무에타이 부부로부터 기쁜 소식을 들었다. 쿠스코(Cusco)에서 함께 쇼핑하다 무에타이 부인이 알록달록한 페루산 핸드메이드 아기 옷을 들고 남편을 쳐다보며 “하나 낳아 줄까?” 하더니, 정말 부인이 임신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달 초 건강한 아기를 낳았다. 3.07㎏의 이 아기는 아마도 부모와 함께 지구별 탐험을 계속할 어린이로 자랄 것이다. 소중한 생명, 이안이의 탄생을 축하한다.

나스카 라인
나스카 라인이 있는 페루의 나스카 평원은 1년에 비가 오는 시간이 단 20분일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곳 중 하나다. 덕분에 유적이 거의 손상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이 유적은 BC 300∼AD 600년 나스카 문명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추정된다. 800개 이상의 선과 300개의 형상, 그리고 70개의 동물과 식물 모양이 450㎢의 평원에 그려져 있는데, 지상에서는 그 형태가 보이지 않는다.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비행기 측량을 하던 중 발견됐는데, 일부는 도로 건설로 훼손됐다.

나스카 라인을 왜 그렸는지에 대해선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가장 유력한 이론은 천문학 유적이란 설이다. 마리아 라이헤(Maria Reiche)에 의하면 나스카 라인은 달력의 일종으로 선은 태양과 행성·별의 이동방향을 표시하고, 동물의 이미지는 별자리를 상징한다. 마리아 라이헤는 1998년 9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일생을 바쳐 연구했던 나스카 평원의 골짜기에 묻혔다고 한다.

UFO의 활주로로 외계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주장, 지하수 물줄기를 확인하기 위한 시설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경비행기를 타고 보면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설에는 수긍할 수 없게 된다. 나스카에서 파나메리카나(Panamericana)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20㎞ 정도 가면, 3개 그림을 관찰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여행정보
한국에서 페루로 가는 직항은 없고, 캐나다나 미국을 경유해야 한다. 란칠레, 에어캐나다, 델타항공, 유나이티드 항공 등이 있다. 나스카는 수도인 리마에서 남쪽으로 370㎞ 떨어져 있고, 버스로 6∼7시간 걸린다. 나스카 자체는 작은 마을로 그다지 볼 것이 없다. 하이라이트는 나스카 라인을 경비행기로 둘러보는 것. 경비행기 회사는 아에로 이카(Aero ICA)와 아에로 콘도르(Aero Condor)가 있는데, 신청자는 20∼30분 4인승 경비행기를 타게 된다. 비용은 1인당 40달러 안팎. 멀미를 조심하자. 탑승 전에 음식은 먹지 않는 편이 좋다. 페루의 화폐단위는 솔(Sol)이며, 1솔은 약 293원. 식사는 5∼15솔, 저렴한 숙박은 15∼20솔(아침식사 포함)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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